소설 글쓰기/삼국지 열전

삼국지 열전 #3 : 동탁

Nowbrief 2025. 5. 8. 09:04

삼국지 열전: 동탁(董卓) – 무력의 제왕, 폭정의 화근

 


“나라의 기틀을 무너뜨린 자, 그러나 결코 단순한 폭군만은 아니었다.”

 


 

1. 서량에서 태어난 무장, 시대를 만나다

 

동탁(董卓)은 자(字) 중영(仲穎). 무위군 릉서현(今 甘肃省 岷县) 출신으로, 태생부터 중원 중심에서 먼 서쪽 변방이었다. 《삼국지》에는 “성정이 용맹하고 담대하며, 기병술에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서량의 토속적 문화와 전투 환경 속에서 성장한 무사로서의 기질을 말해준다.

 

그는 젊은 시절 서역의 강족·선비족 등을 토벌하며 무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며 의식주를 함께하고, 사사로이 재산을 나누는 대범한 기풍으로 인망을 얻었다.

《자치통감》에서는 “동탁은 장군이 된 뒤에도 스스로 소탈하게 병사들과 식사를 함께하고, 절도 없이 행동하였다”는 서술이 있으며, 이는 그가 규율보다는 감정적 결속을 중요시한 지휘관이었음을 시사한다.

 


 

2. 기회는 조정의 혼란 속에서 온다

 

189년, **영제(靈帝)**가 붕어하고 궁중은 환관과 외척의 권력 다툼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영제의 후계로 **소제(劉辯)**가 옹립되었으나, 그의 외삼촌인 **대장군 하진(何進)**은 환관 세력 제거를 위해 원소, 동탁 등 외부 무장들을 불러들인다.

 

이때 동탁은 낙양으로 진군하며, 수도에서 벌어진 피의 내란 속에 무혈 입성하게 된다. 《삼국지》에는 동탁이 병력을 이끌고 입성했을 당시, 원소와 하진이 환관 세력을 제압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결국 하진은 환관에 의해 시해당하고, 환관은 반격으로 원소에게 몰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낙양은 실질적인 무주공산이었고, 이 틈을 타 동탁은 궁정의 주인이 되었다.

 


 

3. 폐립의 칼을 휘두르다 – 유협(헌제) 옹립

 

조정에 진입한 동탁은 당시 황제였던 유변(少帝)을 폐하고, 형제인 **진류왕 유협(劉協)**을 새로운 황제로 세운다. 『후한서』에 따르면 동탁은 “소제가 황제로서 덕망이 없고 인재를 식별하지 못하니 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제위 교체를 강행하였다.

 

이는 당시 정치적 관례를 철저히 위배한 무력에 의한 폐립 행위였으며, 스스로는 **태사(太師)**의 지위에 올라 군권과 국권을 독점했다. 이후의 동탁은 명백한 전제 군주형 권력자로 변모한다. 그는 궁중의 반대자들을 차례차례 숙청하였고, 원로 중신들까지 겁박하였다. 당시의 조정은 황제가 있으되 그림자일 뿐이었다.

 

『자치통감』은 동탁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헌제를 옹립한 날, 궁정 전체가 침묵에 빠졌으며, 일부 대신들은 곧바로 자결하거나 실어증에 걸릴 정도로 충격에 빠졌다고 기록한다.

 


 

4. 낙양 방화 – 문명의 불을 태우다

 

동탁은 낙양이 반란의 온상이라 판단하고 장안으로 천도를 강행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낙양 궁궐과 민가를 불태우고, 궁보, 종묘사직까지도 파괴했다. 이는 단순한 천도를 넘어 수도 자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표현이었고, 동시에 후한 왕조의 정통성 파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삼국지》에는 당시 동탁이 명령을 내려 낙양의 창고, 보물, 서적을 모두 불태우도록 했으며, 도망가는 백성들조차 공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특히 사서(史書)의 상당 부분이 이때 소실되어, 동한의 문화적 맥이 단절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5. 무력에 기댄 통치, 그리고 몰락

 

동탁은 장안에 입성한 후에도 군사 중심의 통치를 이어갔다. 대표적인 병력은 서량병호위장수 여포(呂布). 여포는 용맹하지만 경박하고 충동적인 기질이 강했으며, 동탁은 이를 알고 있음에도 **양자(養子)**로 삼으며 총애하였다.

 

그러나 민심은 갈수록 이반되고, 전국에서 동탁 토벌을 외치는 관동연합군이 결성된다. 조조, 원소, 손견 등 쟁쟁한 군벌이 모두 연합했으나, 내부 불화와 병참 문제로 큰 성과 없이 해체되고 만다. 그럼에도 **왕윤(王允)**은 동탁 제거를 꾀하며 초선(貂蟬)을 이용한 연환계를 펼친다.

 

결국 여포는 초선에 대한 욕망과 동탁에 대한 불신이 겹쳐 배신을 결심하게 된다.

《후한서》에 따르면 동탁은 살해되던 순간, “너 같은 놈이 감히 나를 배신해?”라 외쳤고, 여포는 침착하게 “나라가 동탁으로 인해 혼란스러워졌기에 그 죄를 면할 수 없다”며 창을 들어 목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6. 사후의 영향 – 더 깊어진 혼란

 

동탁의 죽음으로 세상은 평화를 되찾지 못했다. 그의 부하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권력을 이어받았고, 오히려 조정은 더 큰 혼란에 빠진다. 이들은 헌제를 꼭두각시로 삼아 장안을 무대로 내전을 벌였으며, 왕윤은 물론 여포마저도 쫓겨나게 된다.

 

한편 동탁의 통치는 군벌 정치의 서막이었다. 그는 무력으로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선례를 남겼고, 이후 조조, 원소, 유표 등 모든 자들이 이를 본받았다. 후한 왕조는 형해화된 채 조조 정권(위魏)으로 이양되는 수순을 밟게 된다.

 


 

7. 평가: 단순한 폭군인가, 시대의 상징인가

 

동탁은 많은 사서에서 폭정의 대명사, 간웅, 잔혹한 무장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는 “병권이 없이는 중앙 조정이 유지될 수 없다”는 무력 기반 권력론의 구현자이기도 하다. 이는 조조가 이후 “황제를 끼고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던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동탁은 천하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한 채 권력에 취한 무장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의 부패한 조정과 무기력한 관료제를 초토화시킨 거대한 파괴의 상징이었다.

 


 

결론

 

동탁은 분명 폭군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후한의 붕괴를 앞당긴 거대한 방아쇠였으며, 역사는 그의 존재 없이는 삼국 시대를 설명할 수 없다. 그는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북소리였고, 역사의 혼돈을 연 도적이자 문을 연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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